우리가 살고 있는 이천은 ‘지역 역사’(로컬 히스토리)의 보물창고이다. 다른 어떤 지역보다 다양한 역사, 문화 유적을 품고 있으며 그것이 전해주는 무수한 이야기 거리가 있다. 고대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 살다간 사람들의 기록과 흔적을 찾아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감정을 문학적 정서인 시(詩)로 표현해 보는 일은 개인적으로 늘 가슴 뛰는 일이다.
한편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지역 문화에 대한 느낌을 되살려주고 문화의 발자취를 밟게 해주는 통로가 된다면 더없이 보람된 일이다. 지역 문화 유적에 시적 상상력을 더해 보자.
① 원적산
이천은 북쪽과 남쪽에 산세가 형성되어 있다. 한남정맥의 문수봉(용인시 원삼면)에서 북쪽으로 분기한 산줄기는 독조봉, 해룡산, 정개산, 천덕봉, 앵자봉을 거쳐 광주시 남종면 종여울에서 그 맥을 다한다. 63.5km에 이르는 이른바 앵자지맥으로 이천의 북쪽을 울타리처럼 지나는데 원적산 천덕봉이 그 중간에 있는 셈이다. 원적산과 그 주변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한 영원사를 비롯하여 산수유 축제, 육괴정, 반룡송, 이천 백송, 고인돌, 정개산 산신제 등 문화적 볼거리가 널려 있다.
접근성과 높이에 대한 부담이 있지만, 원적산의 최고봉인 천덕봉(632m)에 올라 보면 사방으로 막힘없는 탁 트인 조망을 선사한다. 신둔 도예촌역과 동원대학교 방면 서남릉인 앵자지맥이 첩첩산중을 이루고, 왼쪽으로는 신둔면과 백사면의 들판지대 뒤로 이천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설봉산과 도드람산은 물론이고 이천 남쪽의 먼 산들까지 조망된다. 그리고, 뒤쪽으로 앵자봉, 양자산과 남한강 너머 여주, 양평의 산과 들까지 시원하게 펼쳐진다. 고래처럼 육중한 몸집의 천덕봉 능선에는 4월이 되면 잿빛 겨울을 밀어내고 초록의 봄 물결이 밀려오게 된다.
천덕봉의 봄
독조봉에서 위로 뻗은 산줄기 회색 고래로 누웠다가 허공을 베어오는 꽃바람에 밀려 밀려 북으로 쫓겨 온다
허리춤 아래는 연두빛 물결에 잠기고 잿빛 머리만 거두어 여기 천덕봉에서 한때는 구름이었던 물을 만나 한때는 물이었던 구름을 따라 다시 솟구치니
가라 가라 가르마 같은 저 능선 길 따라 거침없이 가라 길 옆 늘어선 은사시나무도 너를 따라오지 않았느냐 해마다 4월이면 쑥국새도 돌아와 울지 않느냐
앵자봉 너머 여울 끝나는 곳 푸르디 푸른 남한강 큰물에 잠겼다가 바람을 노래하던 억새마저 다 지고 원적봉 오가는 하늘오솔길 열리면 첫눈과 함께 오라 그렇게 다시 오라
② 수하리 고인돌
신둔면에서 백사면에 이르는 지역은 북쪽의 원적산이 거센 북풍을 막아주고 앞에는 복하천으로 향하는 지류인 신둔천과 송말천이 어우러진 너른 평야와 완만한 구릉지대를 이루어 구석기 시대부터 ‘고대 이천인’이 살면서 여러 유적과 유물을 남겼다. 특히 약 50여기의 고인돌이 이천 전역에 남아있는데, 1990년대 후반 이천지역 고인돌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신둔면 수하리와 백사면 현방리 일대의 고인돌이 자세히 알려지게 되었다. 고인돌 축조는 당시 사회에서 그 어떤 것 보다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어서 당시 사회의 구조와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수하리 고인돌은 방아다리들의 논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데 탁자식으로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의 모습을 하고 있다.
돌이 가지는 영속성, 고인돌을 만드는 과정에서의 사회 통합, 하늘의 말을 전하는 사람으로 추앙 받았을 부족장, 유물로 보면 청동기 시대, 역사적으로 보면 고조선 시대 등 고인돌은 그 자체가 역사 교과서이고 고인돌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 조상이다. 그걸 바라보고 있으면 깊은 상념과 정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어느 부족장의 편지
- 수하리 고인돌 -
솟대 너머로 한 움큼 별이 쏟아지던 날 덮개돌 끄트머리에 마지막 쐐기를 박던 근육질 남자의 꿈틀거리는 혈관 껴묻거리 민무늬 그릇에 붉은 띠로 새겨져 있다
오호 오호 어거리 넘차 오호야 *
맨 앞에서 돌칼 휘두르던 거구의 사내 영혼도 그만큼 컸을까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눌러둔 영원한 유택 아래에서 운명처럼 따라다니던 야만의 기억은 이제 잊으시라
정개산 가슴살 뜯어낸 눌진 자리 청동방울 한 쌍 처연히 울어대고 가슴 위 두 손으로 포개어 잡은 비파모양 동검 시퍼런 날 아직 살아있어
고조선의 후예로 만나 어느 길 어느 곳에서 마주친들 지나온 날들은 다르지 않으리니....
오천년 세월 부슬비에 젖어가고 동으로 흐르는 신둔천을 따라 물새 몇 마리 힘껏 날아 오른다
* 이천시 신둔면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평지를 지날 때의 상여소리 후렴구 (2001년 이천문화원 출간 「민속과 구비전승」 P.343)
③ 설봉산 영월암
이천의 진산 설봉산 기슭에 자리 잡은 영월암은 유서 깊은 고찰이다. 신라 문무왕 당시 화엄불교의 상징인 영주 부석사를 창건했던 의상대사가 설봉산 중턱에 북악사라는 큰 절로 창건했는데 나중에 영월암으로 바뀌었다. 이천시 향토유적 3호로 지정된 석조광배와 연화좌대라는 문화재와 보물 822호인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절 앞에는 수령 600년이 넘는 은행나무 2그루가 서 있는데 나옹대사가 꽂은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용화세계를 꿈꾸는 미륵신앙은 고려시대에 성행했는데 이천의 마애불과 석불상은 대부분 고려시대의 것으로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기원하는 미륵신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영월암의 마애여래불은 특이하게 미륵불이면서 스님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사찰과 인연이 깊은 고승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월암 가는 길
된비알 깔딱고개 오름길 뼈마디가 아우성 지를 때쯤 산모롱이 입구 은행나무 인사를 건넨다
옛 연인을 찾아가는 길목이었을까 의상이 점지한 동쪽을 바라보는 한터 수풀 걷어낸 벼랑에 고려 노승은 자신의 민머리 얼굴을 살며시 새겼다
땅에 꽂은 지팡이가 나무가 되었더라는 마애여래가 알고 보니 미륵이라는 천년을 이어진 소문 다가서면 숨겼던 길이라도 내어줄까
산다는 것은 결국 저 거친 산야에 홀로 서야 하는 일 오른손을 펼치고 깨쳐 나가야 할 길
잠시 갈 길 잃은 거사 해 기우는 설봉산 중턱에 앉아 애타게 부처를 찾고 있다
④ 두미리 미륵댕이 석불
이천은 석불의 고장이다. 이천지역 주요 마애불 및 석불상 유물 현황을 보면 석탑을 제외한 마애불과 석불상만 무려 16개가 된다. 조성된 시기는 대부분 고려시대이고 분포지역도 이천의 각 읍면동에 골고루 자리 잡고 있다. 사찰 내에 조성되었거나 지금은 사라진 절터 인근, 혹은 사람 왕래가 잦은 길 옆 가리지 않고 형태도 다양하게 남아있다.
모가면 두미리에는 미륵댕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다. 마을 동쪽으로는 마국산이 서쪽으로는 대덕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고 마을 앞에 쭉 뻗은 도로의 남쪽방향 사실터 고개를 넘으면 안성이다. 미륵댕이 마을 안쪽에는 돌미륵이 서 있고 그 주위로 느티나무가 미륵을 호위하듯 감싸고 있다. 불상은 마모되어 흔적이 희미하며 코와 입은 심하게 마멸된 상태이다.
미륵은 사랑과 자비의 부처로 미래불이다. 고통스런 현세를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것으로 믿었던 미륵불은 압제와 착취에 신음하던 민중들에게는 간절한 희망과 염원의 상징이었다. 미륵댕이 석불은 아직도 마을과 그 인근의 민중들에게 여전히 믿음과 기도의 대상이 되고 있다.
두미리 미륵댕이 석불
두루뭉실 돌덩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제 살 깎아 양식 내어주던 가슴 두근거리던 생애 지나온 풍경 가로질러 흐려져 간다
연꽃 받침도 머리 관도 없던 몸 초라한 절반은 땅속에 묻어두고 천지가 뒤집혀 개벽이 다시 올 때까지 그렇게 사라져 간다
코를 갈아 아들 낳게 해주고 귀 한줌 떼어 곡식 영글게 하고 손마디 뼈를 잘라 도적을 물리치니 대덕(大德)이 별것이던가
지역 문화 유적에 시적 상상력을 더하다
이천문화서포터즈 양한성 (이천문인협회)
우리가 살고 있는 이천은 ‘지역 역사’(로컬 히스토리)의 보물창고이다. 다른 어떤 지역보다 다양한 역사, 문화 유적을 품고 있으며 그것이 전해주는 무수한 이야기 거리가 있다. 고대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 살다간 사람들의 기록과 흔적을 찾아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감정을 문학적 정서인 시(詩)로 표현해 보는 일은 개인적으로 늘 가슴 뛰는 일이다.
한편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지역 문화에 대한 느낌을 되살려주고 문화의 발자취를 밟게 해주는 통로가 된다면 더없이 보람된 일이다. 지역 문화 유적에 시적 상상력을 더해 보자.
① 원적산
이천은 북쪽과 남쪽에 산세가 형성되어 있다. 한남정맥의 문수봉(용인시 원삼면)에서 북쪽으로 분기한 산줄기는 독조봉, 해룡산, 정개산, 천덕봉, 앵자봉을 거쳐 광주시 남종면 종여울에서 그 맥을 다한다. 63.5km에 이르는 이른바 앵자지맥으로 이천의 북쪽을 울타리처럼 지나는데 원적산 천덕봉이 그 중간에 있는 셈이다. 원적산과 그 주변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한 영원사를 비롯하여 산수유 축제, 육괴정, 반룡송, 이천 백송, 고인돌, 정개산 산신제 등 문화적 볼거리가 널려 있다.
접근성과 높이에 대한 부담이 있지만, 원적산의 최고봉인 천덕봉(632m)에 올라 보면 사방으로 막힘없는 탁 트인 조망을 선사한다. 신둔 도예촌역과 동원대학교 방면 서남릉인 앵자지맥이 첩첩산중을 이루고, 왼쪽으로는 신둔면과 백사면의 들판지대 뒤로 이천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설봉산과 도드람산은 물론이고 이천 남쪽의 먼 산들까지 조망된다. 그리고, 뒤쪽으로 앵자봉, 양자산과 남한강 너머 여주, 양평의 산과 들까지 시원하게 펼쳐진다. 고래처럼 육중한 몸집의 천덕봉 능선에는 4월이 되면 잿빛 겨울을 밀어내고 초록의 봄 물결이 밀려오게 된다.
천덕봉의 봄
독조봉에서 위로 뻗은 산줄기
회색 고래로 누웠다가
허공을 베어오는 꽃바람에 밀려 밀려
북으로 쫓겨 온다
허리춤 아래는 연두빛 물결에 잠기고
잿빛 머리만 거두어 여기 천덕봉에서
한때는 구름이었던 물을 만나
한때는 물이었던 구름을 따라
다시 솟구치니
가라 가라
가르마 같은 저 능선 길 따라 거침없이 가라
길 옆 늘어선 은사시나무도 너를 따라오지 않았느냐
해마다 4월이면 쑥국새도 돌아와 울지 않느냐
앵자봉 너머 여울 끝나는 곳
푸르디 푸른 남한강 큰물에 잠겼다가
바람을 노래하던 억새마저 다 지고
원적봉 오가는 하늘오솔길 열리면
첫눈과 함께 오라 그렇게 다시 오라
② 수하리 고인돌
신둔면에서 백사면에 이르는 지역은 북쪽의 원적산이 거센 북풍을 막아주고 앞에는 복하천으로 향하는 지류인 신둔천과 송말천이 어우러진 너른 평야와 완만한 구릉지대를 이루어 구석기 시대부터 ‘고대 이천인’이 살면서 여러 유적과 유물을 남겼다. 특히 약 50여기의 고인돌이 이천 전역에 남아있는데, 1990년대 후반 이천지역 고인돌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신둔면 수하리와 백사면 현방리 일대의 고인돌이 자세히 알려지게 되었다. 고인돌 축조는 당시 사회에서 그 어떤 것 보다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어서 당시 사회의 구조와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수하리 고인돌은 방아다리들의 논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데 탁자식으로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의 모습을 하고 있다.
돌이 가지는 영속성, 고인돌을 만드는 과정에서의 사회 통합, 하늘의 말을 전하는 사람으로 추앙 받았을 부족장, 유물로 보면 청동기 시대, 역사적으로 보면 고조선 시대 등 고인돌은 그 자체가 역사 교과서이고 고인돌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 조상이다. 그걸 바라보고 있으면 깊은 상념과 정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어느 부족장의 편지
- 수하리 고인돌 -
솟대 너머로 한 움큼 별이 쏟아지던 날
덮개돌 끄트머리에 마지막 쐐기를 박던
근육질 남자의 꿈틀거리는 혈관
껴묻거리 민무늬 그릇에 붉은 띠로 새겨져 있다
오호 오호 어거리 넘차 오호야 *
맨 앞에서 돌칼 휘두르던 거구의 사내
영혼도 그만큼 컸을까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눌러둔
영원한 유택 아래에서
운명처럼 따라다니던 야만의 기억은 이제 잊으시라
정개산 가슴살 뜯어낸 눌진 자리
청동방울 한 쌍 처연히 울어대고
가슴 위 두 손으로 포개어 잡은 비파모양 동검
시퍼런 날 아직 살아있어
고조선의 후예로 만나
어느 길 어느 곳에서 마주친들
지나온 날들은 다르지 않으리니....
오천년 세월 부슬비에 젖어가고
동으로 흐르는 신둔천을 따라
물새 몇 마리 힘껏 날아 오른다
* 이천시 신둔면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평지를 지날 때의 상여소리 후렴구
(2001년 이천문화원 출간 「민속과 구비전승」 P.343)
③ 설봉산 영월암
이천의 진산 설봉산 기슭에 자리 잡은 영월암은 유서 깊은 고찰이다. 신라 문무왕 당시 화엄불교의 상징인 영주 부석사를 창건했던 의상대사가 설봉산 중턱에 북악사라는 큰 절로 창건했는데 나중에 영월암으로 바뀌었다. 이천시 향토유적 3호로 지정된 석조광배와 연화좌대라는 문화재와 보물 822호인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절 앞에는 수령 600년이 넘는 은행나무 2그루가 서 있는데 나옹대사가 꽂은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용화세계를 꿈꾸는 미륵신앙은 고려시대에 성행했는데 이천의 마애불과 석불상은 대부분 고려시대의 것으로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기원하는 미륵신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영월암의 마애여래불은 특이하게 미륵불이면서 스님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사찰과 인연이 깊은 고승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월암 가는 길
된비알 깔딱고개 오름길
뼈마디가 아우성 지를 때쯤
산모롱이 입구 은행나무 인사를 건넨다
옛 연인을 찾아가는 길목이었을까
의상이 점지한 동쪽을 바라보는 한터
수풀 걷어낸 벼랑에
고려 노승은 자신의 민머리 얼굴을 살며시 새겼다
땅에 꽂은 지팡이가 나무가 되었더라는
마애여래가 알고 보니 미륵이라는
천년을 이어진 소문
다가서면 숨겼던 길이라도 내어줄까
산다는 것은
결국 저 거친 산야에 홀로 서야 하는 일
오른손을 펼치고 깨쳐 나가야 할 길
잠시 갈 길 잃은 거사
해 기우는 설봉산 중턱에 앉아
애타게 부처를 찾고 있다
④ 두미리 미륵댕이 석불
이천은 석불의 고장이다. 이천지역 주요 마애불 및 석불상 유물 현황을 보면 석탑을 제외한 마애불과 석불상만 무려 16개가 된다. 조성된 시기는 대부분 고려시대이고 분포지역도 이천의 각 읍면동에 골고루 자리 잡고 있다. 사찰 내에 조성되었거나 지금은 사라진 절터 인근, 혹은 사람 왕래가 잦은 길 옆 가리지 않고 형태도 다양하게 남아있다.
모가면 두미리에는 미륵댕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다. 마을 동쪽으로는 마국산이 서쪽으로는 대덕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고 마을 앞에 쭉 뻗은 도로의 남쪽방향 사실터 고개를 넘으면 안성이다. 미륵댕이 마을 안쪽에는 돌미륵이 서 있고 그 주위로 느티나무가 미륵을 호위하듯 감싸고 있다. 불상은 마모되어 흔적이 희미하며 코와 입은 심하게 마멸된 상태이다.
미륵은 사랑과 자비의 부처로 미래불이다. 고통스런 현세를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것으로 믿었던 미륵불은 압제와 착취에 신음하던 민중들에게는 간절한 희망과 염원의 상징이었다. 미륵댕이 석불은 아직도 마을과 그 인근의 민중들에게 여전히 믿음과 기도의 대상이 되고 있다.
두미리 미륵댕이 석불
두루뭉실 돌덩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제 살 깎아 양식 내어주던
가슴 두근거리던 생애
지나온 풍경 가로질러 흐려져 간다
연꽃 받침도
머리 관도 없던 몸
초라한 절반은 땅속에 묻어두고
천지가 뒤집혀 개벽이 다시 올 때까지
그렇게 사라져 간다
코를 갈아 아들 낳게 해주고
귀 한줌 떼어 곡식 영글게 하고
손마디 뼈를 잘라 도적을 물리치니
대덕(大德)이 별것이던가
곁에 서 있는 바람벽 여섯 느티나무
이제는 목신(木神)이 되어가고
두루뭉실 돌덩이
스스로 낮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