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통과 예술을 만나다.
[ 해외문화탐방 참여자 (글) 권미숙, (사진) 류봉열 ]
새벽이다. 일본 문화탐방은 여권만 빼면 마치 제주도를 방문하는 일처럼 몸도 편하고 마음도 가볍다. 여행의 묘미는 낯선 장소를 대면하는 기대와 설렘이다, 예술의 섬, 나오시마로의 행복한 비행은 더더욱 그렇다.
제1일 차(5.23)
일본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입국절차를 마치자 전용 버스는 오사카 만을 돌아 첫 방문지인 아와지시에 있는 복합문화시설인 ‘유메부타이’에 도착했다. 계단식 정원 ‘유메부타이’의 풍경은 단정하며 아름다웠다. 물의 정원에는 수산시장에서 엄선해서 가져왔다는 백만 개의 조가비가 반짝였다. 백 개의 네모 화단은 다양한 꽃들이 피고 지며, 오사카 만의 시원한 바람을 품고 있었다. 기적의 별 식물원, 연못 지붕 아래 지어진 물의 절 등 안도 타다오의 섬세한 손길로 건축물과 식물, 바다가 공존하는 애정이 듬뿍 느껴지는 꿈의 무대로 창조됐다.
점심을 먹고 다카마츠의 특별한 명승지 리츠린 공원으로 향했다. 에도 시대 초기의 정원으로, 一步一景(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다른 경치가 보임)으로 불리는 정원에는 다양한 꽃들이 반기고 장인의 손질을 거친 천여 그루의 소나무의 용트림 같은 자태가 묘하다.
첫날 저녁 식사는 샤브샤브다. 곁들인 시원한 생맥주, 그냥 먹어도 쫄깃한 우동 생면은 여행 첫날의 피곤함을 일시에 날려 버렸다. 우동의 본 고장 사누키 우동답다.
제2일 차(5.24) / 나오시마 섬, 예술의 감동 속으로 빠지다.
‘건축의 최종 목적은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여 그들을 모이게 하는 장소를 창조하는 일이다.’ 1995년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안도 타다오가 한 말이다. 사실 이번 문화탐방에서 둘째 날 일정이 가장 기대되었다. 나오시마 섬 프로젝트의 핵심인 지중미술관, 이우환미술관, 베네세박물관 관람을 문화탐방 중의 백미로 꼽았기 때문이다.
페리에서 나온 전용 버스는 항구 마을을 넘어 곧 지중 미술관에 도착했다. 지중미술관은 2004년에 설립됐다. 세토우치의 아름다운 경관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건물 대부분을 지하에 매설했다. 시간을 두고 미술관 입장은 진행됐다. 안도 타다오의 건축 정수가 오롯이 반영된 지중미술관 속으로 우리는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사유하면서 하나 둘 빨려 들어갔다.
나무가 우거진 오르막길을 오르니 지중미술관 입구가 보였다. 건물 벽이 공간을 간결하게 가로질렀으나 닫혀 있지 않고, 열린 공간에는 안도 타다오가 만들어낸 빛과 그림자, 흰 구름과 푸른 하늘이 미술관과 하나가 되고 있었다.
월터 드 마리아, 클로드 모네, 제임스 터렐 등 세 작가의 작품은 어떤 모습으로 공간과 연결되어 우리를 반길지 궁금했다.
첫 번째는 설치 미술작가 월터 드 마리아의 ‘time/timeless/no time(시간/영원/시간 없음)’이란 작품이다. 한 공간 안에 직경 2.2m의 구체와 금박을 입힌 27개의 목 조각을 사방에 배치했다. 공간을 동서로 구성해 일출부터 일몰까지 작품은 시시각각 변한다. 입구에서 계단 위에 놓인 검은 구체를 보는 순간, 마음은 두근거렸다. 천장의 네모 안으로 하늘이 보이고, 구체로 빛이 쏟아지는 장면은 숭고했다. 마치 베르니니의 걸작 <성녀 테레사의 환희>처럼 기쁨에 가득한 희열을 느낄 정도였다.
두 번째는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다. 모네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인상파 작가 중 하나다. 모네는 햇빛 속에서 수련을 그렸다. 지중미술관의 수련은 지하에서도 자연의 빛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절묘하게 배치했다. 노안으로 거의 보이지 않게 된 말년에 그린 수련은 화가를 많이도 닮았다. 거친 물감을 따라가다 보면 꽃은 피고, 잎이 보이며, 물은 일렁이고, 빛은 반짝였다. 아름다운 화폭을 두고 두고 꺼내 볼 수 있도록 눈 속에 담고 또 담았다.
세 번째는 제임스 터렐의 <빛을 경험하다>를 경험했다. 빛, 그 자체를 예술로 표현한 터렐은 작품을 명확하게 체험하도록 형태와 크기를 직접 설계했다. 우리는 10여 분 동안 작가가 창조한 빛의 변화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지중미술관에서 빛의 향연은 하루 아니 사계절 내내 작품이나 공간의 표정과 풍경을 멈추지 않고 마치 계절의 경과나 순환처럼 변화시킨다. 안도 타다오가 창조한 공간과 세 작가가 빚어낸 작품은 각자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였다. 지중미술관의 존재 이유였다.
이우환 미술관으로 향했다. 건축물이 주위 환경과 교감하며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공간으로 역시 안다 티다오가 건축했다. 철학자이기도 한 이우환 작가는 ‘돌은 시간의 덩어리다. 지구보다도 오래됐다. 돌에서 추출한 물질이 철판이다. 결국, 돌과 철판은 서로 형제다. 돌과 철판의 만남, 자연과 문명의 대화를 통해 미래를 암시하는 일이 내 작품의 발상이다.‘라고 이우환 작가는 적었다.
자연을 상징하는 돌, 산업사회를 대표하는 강철판 등의 ’관계항‘ 시리즈는 그래서 나오시마 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최근에 제작된 ‘무한문(2019)’의 아치는 바다로 나갈 수 있는 문, 산골짜기로 들어오게 하는 문으로 막힌 벽이 없이 사람과 자연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무한한 통로처럼 보였다.
밸리 갤러리에는 호박을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은 쿠사마 야요이의 스테인리스 공을 전시한 나르시소스 정원과 오자와 쓰요시의 불상88-88(2006/2022)로 구성됐다. 특히 불상의 재료는 나오시마 전역에 남아있는 광석에서 금속을 빼낸 찌꺼기인 슬래그로 만들었다. 예술가들의 재료에 대한 개념인식이 놀랍고 기발했다.
바다를 보며 산책하듯 베네세 미술관으로 향했다. 해안가에 놓인 노란색과 검은색의 나룻배는 제니퍼 바트렛의 작품이다. 절벽에 점처럼 보이는 액자 역시 스기모토 히로시의 작품이다.
’자연과 건축, 예술의 공존‘을 주제로 1992년에 설립한 베네세 하우스로 올라갔다. 산뜻한 색감의 데이비드 호크니의 ’A walk around the hotel courtyard acatlan(호텔 안뜰을 산책하다, 1985)’, 리차드 롱의 ‘island sea driftwood(섬으로 떠내려온 목재, 1997)’, 브루스 나우만 ’100개의 생사(1984) 등등 미술사에서나 볼 수 있는 작품이 즐비했다. 부족한 시간을 탓하며 떠나는 발걸음이 못내 아쉬웠다. 기회가 된다면 베네세 오벌 하우스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싶다.
해안가를 따라 걸었다. 곳곳에 조각작품이 바다와 섬을 이어줬다. 니키드 생팔의 화려한 작품은 지나가는 나그네를 반겼다. 그 끝에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 호박이 바다를 등 뒤로 빛나고 있었다. 나오시마 섬의 상징적인 작품이다. 여기서 인증샷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노란 호박 아래 바닷가는 빛났고 시원했다.
400여 년 역사를 가진 혼무라 마을로 이동했다. 2006년 빈집을 예술가들에 의해 예술작품으로 복원한 ‘이에 프로젝트(2006)’가 이루어진 마을이다. 주민이 직접 참여하면서 섬 주민의 삶을 녹아냈다. 안내 팸플릿을 들고 빈집을 찾아다니는 탐방은 마치 낯선 마을에서 보물찾기 놀이를 하는 듯 즐거운 경험이었다.
다다미방에 오색의 목조각 동백꽃이 툭 던져진 바둑 기사들이 모이는 장소인 고카이쇼(요시히로 스다) 등 여섯 곳을 방문했다. 특히 ‘이에 프로젝트’ 제1탄으로 완성된 ‘카도야’가 인상적이었다. 200년 전에 지어진 옛 가옥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후 다다미를 뜯어내고 그 자리에 물을 채웠다. 거기에 125개의 디지털 숫자를 넣었다. 1에서 9까지의 숫자는 섬 주민이 각자 느끼는 세월의 속도를 표현했단다. 아쉬운 점은 안도 타다오가 설계하고 빛의 마술사 제임스 터렐이 작품을 기획한 미나미데라를 지나칠 수밖에 없던 점이다.
빈집을 예술로 바꾼 ‘이에 프로젝트’는 나오시마의 역사와 유물을 존중한 결과물이다. ‘예술(건축)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며 움직이게 한다’는 건축가의 말이 진심으로 느껴졌다.
출항 전 쿠사마 야요이의 빨간 호박 앞으로 일행은 몰려갔다. 노란 호박보다 조금 크고 구멍과 뚜껑도 있었다. 시간이 아쉬울 정도로 둘러보며 일행은 즐겁게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나오시마 섬의 예술과 작별할 시간은 다가왔다. 언젠가는 다시 한번 오리라 다짐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제3일 차(5.25) / 현대미술과 전통예술을 체험하다.
나루토 교 아래의 소용돌이치는 물결은 생각보다 거칠지는 않았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천둥 번개가 치는 날 방문하면, 입장할 때 나눠 준 엽서 장면처럼 한 번에 집어삼킬 괴물 같은 파도의 소용돌이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츠카 미술관에 도착했다. 포카리스웨트 음료를 만든 오츠카 그룹이 창립 75주년 기념사업으로 도쿠시마에 세웠다. 바티칸 시스티나성당의 천장벽화를 시작으로 고대, 중세, 르네상스, 근현대미술로 이어지는 작품을 짧은 시간 안에 보려니 마음은 급하고, 욕심은 한없고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결국, 유명 작가의 작품만 찾아 휙 보고 내려왔다.
샤미센과 인형극을 볼 수 있는 ‘아와쥬로베 저택’에 도착했다. 닌교조루리 ‘게이죠 아와노 나루토’는 죄상도 밝혀지지 않은 채, 번의 정책상 희생양으로 처형된 쇼야 이타토 쥬로베의 이름을 빌려 만들어진 집안 소동 이야기다. 공연 중 오유미가 바느질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실에 침을 발라서 바늘귀에 끼우고 천에 바느질하며 실을 잡아당기는 모습이 긴장이 느껴질 만큼 동작에 절도가 있다. 내용을 잘 몰라도 변사의 목소리만은 애절했다.
인형극이 끝난 뒤 인형을 조종하는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 나의 역할은 고개 숙이기, 눈감기, 손목 움직이기다. 처음 해보니 제각각 움직이고, 서툴러 폭소가 터졌지만, 동작 하나하나를 얼마나 섬세하게 조종하는지 알게 되었다.
문화탐방의 마지막 일정은 ‘아와오도리 공연’이다. ‘춤추는 바보, 그 춤을 구경하는 바보, 차라리 춤추는 바보가 낫다’라는 말처럼 손을 들어 올리고 발을 옮기며 걸어나가는, 누구라도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춤사위다. 우리는 흥겹고 신나게 춤을 추며 공연을 즐겼다. 배우가 ‘아얏 토사(잘 지냈어?)’하면, 우리는 ‘아얏토 얏토(잘 지내구말구)’하며 맛장구를 쳤다.
나흘간의 일정이 마침내 끝났다. 아쉬운 마음은 가득했다. 문화탐방을 마무리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를 꼽으라면 단연코 나오시마 섬이다.
“나오시마 섬을 한자로 쓰면 直島(올바르고 수수하다)이다.”
건축가의 상상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기업가의 혁신적인 사고가 부럽고, 자연을 이용하여 작가의 작품이 가장 빛날 수 있게 만들어낸 건축가의 마음이 존경스럽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예술가들을 칭찬하고 싶다. 지금도 섬사람들은 살고 있고 그들의 삶과 어우러진 작품을 위해 노력하는 기업가, 건축가, 예술가들의 열정에 경의를 보낸다.
그 마음이 모여 만든 나오시마 섬은 수수하면서도 아름답고 고요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문화 중산층을 지향하는 우리 역시 통합적인 사고와 시각으로 지역 문화 설계에 접근하고 참여하자. 무엇이 유의미한 사고와 행동인지 타산지석의 교훈을 던진 이번 문화탐방은 우리가 절대 놓치면 안 되는, 반드시 풀어야 할 중요한 숙제를 던져주었다.
3박 4일 동안 예술의 세계에 몰입했던 나오시마 섬의 문화탐방은 내 일생의 버킷리스트 하나를 완성한 일대 사건이지만, 또 가고 싶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일본의 전통과 예술을 만나다.
[ 해외문화탐방 참여자 (글) 권미숙, (사진) 류봉열 ]
새벽이다. 일본 문화탐방은 여권만 빼면 마치 제주도를 방문하는 일처럼 몸도 편하고 마음도 가볍다. 여행의 묘미는 낯선 장소를 대면하는 기대와 설렘이다, 예술의 섬, 나오시마로의 행복한 비행은 더더욱 그렇다.
제1일 차(5.23)
일본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입국절차를 마치자 전용 버스는 오사카 만을 돌아 첫 방문지인 아와지시에 있는 복합문화시설인 ‘유메부타이’에 도착했다. 계단식 정원 ‘유메부타이’의 풍경은 단정하며 아름다웠다. 물의 정원에는 수산시장에서 엄선해서 가져왔다는 백만 개의 조가비가 반짝였다. 백 개의 네모 화단은 다양한 꽃들이 피고 지며, 오사카 만의 시원한 바람을 품고 있었다. 기적의 별 식물원, 연못 지붕 아래 지어진 물의 절 등 안도 타다오의 섬세한 손길로 건축물과 식물, 바다가 공존하는 애정이 듬뿍 느껴지는 꿈의 무대로 창조됐다.
점심을 먹고 다카마츠의 특별한 명승지 리츠린 공원으로 향했다. 에도 시대 초기의 정원으로, 一步一景(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다른 경치가 보임)으로 불리는 정원에는 다양한 꽃들이 반기고 장인의 손질을 거친 천여 그루의 소나무의 용트림 같은 자태가 묘하다.
첫날 저녁 식사는 샤브샤브다. 곁들인 시원한 생맥주, 그냥 먹어도 쫄깃한 우동 생면은 여행 첫날의 피곤함을 일시에 날려 버렸다. 우동의 본 고장 사누키 우동답다.
제2일 차(5.24) / 나오시마 섬, 예술의 감동 속으로 빠지다.
‘건축의 최종 목적은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여 그들을 모이게 하는 장소를 창조하는 일이다.’ 1995년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안도 타다오가 한 말이다. 사실 이번 문화탐방에서 둘째 날 일정이 가장 기대되었다. 나오시마 섬 프로젝트의 핵심인 지중미술관, 이우환미술관, 베네세박물관 관람을 문화탐방 중의 백미로 꼽았기 때문이다.
페리에서 나온 전용 버스는 항구 마을을 넘어 곧 지중 미술관에 도착했다. 지중미술관은 2004년에 설립됐다. 세토우치의 아름다운 경관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건물 대부분을 지하에 매설했다. 시간을 두고 미술관 입장은 진행됐다. 안도 타다오의 건축 정수가 오롯이 반영된 지중미술관 속으로 우리는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사유하면서 하나 둘 빨려 들어갔다.
나무가 우거진 오르막길을 오르니 지중미술관 입구가 보였다. 건물 벽이 공간을 간결하게 가로질렀으나 닫혀 있지 않고, 열린 공간에는 안도 타다오가 만들어낸 빛과 그림자, 흰 구름과 푸른 하늘이 미술관과 하나가 되고 있었다.
월터 드 마리아, 클로드 모네, 제임스 터렐 등 세 작가의 작품은 어떤 모습으로 공간과 연결되어 우리를 반길지 궁금했다.
첫 번째는 설치 미술작가 월터 드 마리아의 ‘time/timeless/no time(시간/영원/시간 없음)’이란 작품이다. 한 공간 안에 직경 2.2m의 구체와 금박을 입힌 27개의 목 조각을 사방에 배치했다. 공간을 동서로 구성해 일출부터 일몰까지 작품은 시시각각 변한다. 입구에서 계단 위에 놓인 검은 구체를 보는 순간, 마음은 두근거렸다. 천장의 네모 안으로 하늘이 보이고, 구체로 빛이 쏟아지는 장면은 숭고했다. 마치 베르니니의 걸작 <성녀 테레사의 환희>처럼 기쁨에 가득한 희열을 느낄 정도였다.
두 번째는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다. 모네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인상파 작가 중 하나다. 모네는 햇빛 속에서 수련을 그렸다. 지중미술관의 수련은 지하에서도 자연의 빛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절묘하게 배치했다. 노안으로 거의 보이지 않게 된 말년에 그린 수련은 화가를 많이도 닮았다. 거친 물감을 따라가다 보면 꽃은 피고, 잎이 보이며, 물은 일렁이고, 빛은 반짝였다. 아름다운 화폭을 두고 두고 꺼내 볼 수 있도록 눈 속에 담고 또 담았다.
세 번째는 제임스 터렐의 <빛을 경험하다>를 경험했다. 빛, 그 자체를 예술로 표현한 터렐은 작품을 명확하게 체험하도록 형태와 크기를 직접 설계했다. 우리는 10여 분 동안 작가가 창조한 빛의 변화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지중미술관에서 빛의 향연은 하루 아니 사계절 내내 작품이나 공간의 표정과 풍경을 멈추지 않고 마치 계절의 경과나 순환처럼 변화시킨다. 안도 타다오가 창조한 공간과 세 작가가 빚어낸 작품은 각자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였다. 지중미술관의 존재 이유였다.
이우환 미술관으로 향했다. 건축물이 주위 환경과 교감하며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공간으로 역시 안다 티다오가 건축했다. 철학자이기도 한 이우환 작가는 ‘돌은 시간의 덩어리다. 지구보다도 오래됐다. 돌에서 추출한 물질이 철판이다. 결국, 돌과 철판은 서로 형제다. 돌과 철판의 만남, 자연과 문명의 대화를 통해 미래를 암시하는 일이 내 작품의 발상이다.‘라고 이우환 작가는 적었다.
자연을 상징하는 돌, 산업사회를 대표하는 강철판 등의 ’관계항‘ 시리즈는 그래서 나오시마 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최근에 제작된 ‘무한문(2019)’의 아치는 바다로 나갈 수 있는 문, 산골짜기로 들어오게 하는 문으로 막힌 벽이 없이 사람과 자연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무한한 통로처럼 보였다.
밸리 갤러리에는 호박을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은 쿠사마 야요이의 스테인리스 공을 전시한 나르시소스 정원과 오자와 쓰요시의 불상88-88(2006/2022)로 구성됐다. 특히 불상의 재료는 나오시마 전역에 남아있는 광석에서 금속을 빼낸 찌꺼기인 슬래그로 만들었다. 예술가들의 재료에 대한 개념인식이 놀랍고 기발했다.
바다를 보며 산책하듯 베네세 미술관으로 향했다. 해안가에 놓인 노란색과 검은색의 나룻배는 제니퍼 바트렛의 작품이다. 절벽에 점처럼 보이는 액자 역시 스기모토 히로시의 작품이다.
’자연과 건축, 예술의 공존‘을 주제로 1992년에 설립한 베네세 하우스로 올라갔다. 산뜻한 색감의 데이비드 호크니의 ’A walk around the hotel courtyard acatlan(호텔 안뜰을 산책하다, 1985)’, 리차드 롱의 ‘island sea driftwood(섬으로 떠내려온 목재, 1997)’, 브루스 나우만 ’100개의 생사(1984) 등등 미술사에서나 볼 수 있는 작품이 즐비했다. 부족한 시간을 탓하며 떠나는 발걸음이 못내 아쉬웠다. 기회가 된다면 베네세 오벌 하우스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싶다.
해안가를 따라 걸었다. 곳곳에 조각작품이 바다와 섬을 이어줬다. 니키드 생팔의 화려한 작품은 지나가는 나그네를 반겼다. 그 끝에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 호박이 바다를 등 뒤로 빛나고 있었다. 나오시마 섬의 상징적인 작품이다. 여기서 인증샷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노란 호박 아래 바닷가는 빛났고 시원했다.
400여 년 역사를 가진 혼무라 마을로 이동했다. 2006년 빈집을 예술가들에 의해 예술작품으로 복원한 ‘이에 프로젝트(2006)’가 이루어진 마을이다. 주민이 직접 참여하면서 섬 주민의 삶을 녹아냈다. 안내 팸플릿을 들고 빈집을 찾아다니는 탐방은 마치 낯선 마을에서 보물찾기 놀이를 하는 듯 즐거운 경험이었다.
다다미방에 오색의 목조각 동백꽃이 툭 던져진 바둑 기사들이 모이는 장소인 고카이쇼(요시히로 스다) 등 여섯 곳을 방문했다. 특히 ‘이에 프로젝트’ 제1탄으로 완성된 ‘카도야’가 인상적이었다. 200년 전에 지어진 옛 가옥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후 다다미를 뜯어내고 그 자리에 물을 채웠다. 거기에 125개의 디지털 숫자를 넣었다. 1에서 9까지의 숫자는 섬 주민이 각자 느끼는 세월의 속도를 표현했단다. 아쉬운 점은 안도 타다오가 설계하고 빛의 마술사 제임스 터렐이 작품을 기획한 미나미데라를 지나칠 수밖에 없던 점이다.
빈집을 예술로 바꾼 ‘이에 프로젝트’는 나오시마의 역사와 유물을 존중한 결과물이다. ‘예술(건축)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며 움직이게 한다’는 건축가의 말이 진심으로 느껴졌다.
출항 전 쿠사마 야요이의 빨간 호박 앞으로 일행은 몰려갔다. 노란 호박보다 조금 크고 구멍과 뚜껑도 있었다. 시간이 아쉬울 정도로 둘러보며 일행은 즐겁게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나오시마 섬의 예술과 작별할 시간은 다가왔다. 언젠가는 다시 한번 오리라 다짐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제3일 차(5.25) / 현대미술과 전통예술을 체험하다.
나루토 교 아래의 소용돌이치는 물결은 생각보다 거칠지는 않았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천둥 번개가 치는 날 방문하면, 입장할 때 나눠 준 엽서 장면처럼 한 번에 집어삼킬 괴물 같은 파도의 소용돌이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츠카 미술관에 도착했다. 포카리스웨트 음료를 만든 오츠카 그룹이 창립 75주년 기념사업으로 도쿠시마에 세웠다. 바티칸 시스티나성당의 천장벽화를 시작으로 고대, 중세, 르네상스, 근현대미술로 이어지는 작품을 짧은 시간 안에 보려니 마음은 급하고, 욕심은 한없고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결국, 유명 작가의 작품만 찾아 휙 보고 내려왔다.
샤미센과 인형극을 볼 수 있는 ‘아와쥬로베 저택’에 도착했다. 닌교조루리 ‘게이죠 아와노 나루토’는 죄상도 밝혀지지 않은 채, 번의 정책상 희생양으로 처형된 쇼야 이타토 쥬로베의 이름을 빌려 만들어진 집안 소동 이야기다. 공연 중 오유미가 바느질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실에 침을 발라서 바늘귀에 끼우고 천에 바느질하며 실을 잡아당기는 모습이 긴장이 느껴질 만큼 동작에 절도가 있다. 내용을 잘 몰라도 변사의 목소리만은 애절했다.
인형극이 끝난 뒤 인형을 조종하는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 나의 역할은 고개 숙이기, 눈감기, 손목 움직이기다. 처음 해보니 제각각 움직이고, 서툴러 폭소가 터졌지만, 동작 하나하나를 얼마나 섬세하게 조종하는지 알게 되었다.
문화탐방의 마지막 일정은 ‘아와오도리 공연’이다. ‘춤추는 바보, 그 춤을 구경하는 바보, 차라리 춤추는 바보가 낫다’라는 말처럼 손을 들어 올리고 발을 옮기며 걸어나가는, 누구라도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춤사위다. 우리는 흥겹고 신나게 춤을 추며 공연을 즐겼다. 배우가 ‘아얏 토사(잘 지냈어?)’하면, 우리는 ‘아얏토 얏토(잘 지내구말구)’하며 맛장구를 쳤다.
나흘간의 일정이 마침내 끝났다. 아쉬운 마음은 가득했다. 문화탐방을 마무리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를 꼽으라면 단연코 나오시마 섬이다.
“나오시마 섬을 한자로 쓰면 直島(올바르고 수수하다)이다.”
건축가의 상상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기업가의 혁신적인 사고가 부럽고, 자연을 이용하여 작가의 작품이 가장 빛날 수 있게 만들어낸 건축가의 마음이 존경스럽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예술가들을 칭찬하고 싶다. 지금도 섬사람들은 살고 있고 그들의 삶과 어우러진 작품을 위해 노력하는 기업가, 건축가, 예술가들의 열정에 경의를 보낸다.
그 마음이 모여 만든 나오시마 섬은 수수하면서도 아름답고 고요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문화 중산층을 지향하는 우리 역시 통합적인 사고와 시각으로 지역 문화 설계에 접근하고 참여하자. 무엇이 유의미한 사고와 행동인지 타산지석의 교훈을 던진 이번 문화탐방은 우리가 절대 놓치면 안 되는, 반드시 풀어야 할 중요한 숙제를 던져주었다.
3박 4일 동안 예술의 세계에 몰입했던 나오시마 섬의 문화탐방은 내 일생의 버킷리스트 하나를 완성한 일대 사건이지만, 또 가고 싶다. 고맙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