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酒道)를 주도(主導)하다
한정혜 작가·시민기록자
어렸을 적 기억을 더듬다 보면 막걸리가 나온다. 아홉 살 되던 해의 어느 여름이었는데, 물놀이를 마치고 부침개를 먹던 나와 이종사촌들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외할아버지가 알려줬는데 여름에 막걸리 한 모금이 더위를 가시게 해준대.”
간장 종지에 병아리 발목 빠질 만큼의 막걸리를 받아 마신 우리는 낮잠을 늘어지게 잤다. 물놀이 때문인지 막걸리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그해 더위도 타지 않았다.
그날 이후 막걸리는 ‘더위를 가시게 하는 약주’로 각인되었다. 종종 ‘대낮의 막걸리는 부모도 못 알아보게 한다’라는 누명을 쓰긴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과했을 때의 이야기다.
적당하면 좋지만 과하면 문제를 일으키는 술. 시대와 나라가 달라도 세계 여러 나라에 ‘주도(酒道)’가 만들어진 이유도 그래서일 거다. 그런 면에서 ‘주도(酒道)’ 역시 지역의 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난 9월 16일 창전동 소재 온천공원에서 열린 “경기31 술 문화 우리가 주도(酒道)한다” 역시 지역의 술을 통해 지역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축제였다.
이 축제는 지역 특성을 살린 콘텐츠를 구성해 경기도의 지역문화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페스티벌 31’이라는 이름으로 2014년부터 이어온 지역특성화박람회다. 올해 제10회를 맞이한 ‘페스티벌 31‘은 경기도문화원연합회와 이천문화원 공동 주관으로 경기도 서른한 개 지역의 술 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자리였다.
축제 현장이 바로 집 앞이어서 가볍게 찾아가면서 술을 매개로 한 축제라서 안전 문제가 조금 염려됐다. 하지만 온천공원 북측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이런 기우는 싹 사라졌다.
이천문화원에서는 입장객의 신분증 확인 후 성인에게만 주류 구매와 시음이 가능한 노랑 팔찌를 제공해 미성년자의 주류 시음과 구매를 방지했다. 성인인증 시음용 컵도 준비해 누구나 축제에 입장할 수는 있어도 아무나 술을 마실 순 없도록 철저히 단속했다. 운영본부도 크게 마련해 응급의료진과 안전관리 요원도 여러 명 상주시켰다.
알코올이 들어있어 마시면 취하는 음료인 술은 신화 속에 나올 정도로 역사가 오래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건국 신화가 담긴 〈고삼국사기(古三國史記)〉에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술을 이용해 유화를 유혹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고, 그리스신화에도 제우스의 아들 디오니소스가 동굴에 쌓아두었던 포도에서 포도주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러한 술을 주제로 한 독특한 축제여서 그런지 온천공원은 가족 혹은 친구나 연인 단위로 행사장을 찾은 남녀노소로 아침 일찍부터 붐볐다. 초록 가득하던 온천공원은 화기애애한 관람객들로 꽃이 활짝 핀 봄날 같았다.
행사장은 특색에 따라 총 다섯 개의 존으로 구성됐고, 주를 이룬 술은 우리나라 전통주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막걸리였다.
양조장이나 가양주 장인의 발효 방법에 그 맛이 천차만별인 막걸리는 서른한 개 지역문화원 부스에 따라 신맛, 단맛, 떫은맛 등 다채로운 맛과 향을 뽐내며 관람객을 맞았다.
맥주 회사 동료 여럿이 팀을 꾸려 견학 겸 시음을 나온 일행 중 한 명은 “동네에서 이렇게 다양한 지역 술을 만나고 깊은 맛과 향을 내는 술도 알게 돼 주류업계 종사자로서 반갑다.”라며 행사 취지에 크게 공감했다.
개인적으로는 무거운 송명섭 막걸리나 신맛 강한 금정산성 막걸리를 좋아해서인지 양주문화원 부스에서 오래 머물렀다. 김양주 장인의 가양주는 한 모금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바로 고이게 하는 맛으로 막걸리 애호가의 입맛을 금세 사로잡았다. 쌀과 누룩, 그리고 물. 세 가지 재료의 배합만으로 다양한 맛과 향을 내는 막걸리에 감탄하며 지갑도 꽤 열었다.
알코올 함량 53%인 증류주는 부드러운 목 넘김 다음에 속을 훈훈하게 덥혀주었다. 추운 겨울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나 기름진 음식의 반주로 곁들이기에 좋아 애주가인 지인에게 선물하려고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천에서 생산하는 막걸리와 맥주, 와인, 그리고 관련 제품들도 모처럼 한자리에서 만나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천의 특산물인 게걸무 음식들도 특유의 식감으로 관람객들에게 금강산도 식후경의 맛을 선사했다. 홀짝홀짝 여러 잔의 시음으로 살며시 오른 취기는 동두천문화원의 맑고 시원한 연꽃차로 삭혔고, 주도 체험, 예쁜 술잔 만들기, 그리고 해당 지역의 시니어들과 함께한 문화 활동을 선보인 ’13개 마을의 유쾌한 노년 이야기 존에서의 다채로운 전시와 체험으로 인기가 많았다.
온천공원 주 통행로를 가리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가장자리에 배열한 아담한 행사 부스는 축제의 백미였다. 같은 디자인으로 앙증맞게 내건 지역문화원 간판과 시음 및 전시 판매용 작은 테이블도 관람객의 동선을 막지 않았다. 옛날 잔칫집 마당이 꼭 이런 모습이었다. 마당 한 가운데에 손님을 주인공으로 모시고 잔칫집 주방과 주인장은 외곽에 자리했다.
무대 행사 음향도 어깨춤이 날 정도로만 흥을 돋워 주말 오전 늦잠을 즐기는 인근 지역 주민들의 미간을 좁히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관람객들은 오히려 오전 열한 시부터 오후 네 시까지 딱 다섯 시간만 이어진 축제를 아쉬워했다. 더러는 벌써 내년을 기약했다. 그래도 지역의 멋과 맛이 담겨 묵직해진 노란 장바구니에 만족하며 집으로 향했다.
지역문화를 주도(主導)하는 이천문화원의 새롭고 이색적인 ’주도(酒道)‘축제에 기분 좋게 취한 하루였다.
주도(酒道)를 주도(主導)하다
한정혜 작가·시민기록자
어렸을 적 기억을 더듬다 보면 막걸리가 나온다. 아홉 살 되던 해의 어느 여름이었는데, 물놀이를 마치고 부침개를 먹던 나와 이종사촌들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외할아버지가 알려줬는데 여름에 막걸리 한 모금이 더위를 가시게 해준대.”
간장 종지에 병아리 발목 빠질 만큼의 막걸리를 받아 마신 우리는 낮잠을 늘어지게 잤다. 물놀이 때문인지 막걸리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그해 더위도 타지 않았다.
그날 이후 막걸리는 ‘더위를 가시게 하는 약주’로 각인되었다. 종종 ‘대낮의 막걸리는 부모도 못 알아보게 한다’라는 누명을 쓰긴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과했을 때의 이야기다.
적당하면 좋지만 과하면 문제를 일으키는 술. 시대와 나라가 달라도 세계 여러 나라에 ‘주도(酒道)’가 만들어진 이유도 그래서일 거다. 그런 면에서 ‘주도(酒道)’ 역시 지역의 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난 9월 16일 창전동 소재 온천공원에서 열린 “경기31 술 문화 우리가 주도(酒道)한다” 역시 지역의 술을 통해 지역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축제였다.
이 축제는 지역 특성을 살린 콘텐츠를 구성해 경기도의 지역문화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페스티벌 31’이라는 이름으로 2014년부터 이어온 지역특성화박람회다. 올해 제10회를 맞이한 ‘페스티벌 31‘은 경기도문화원연합회와 이천문화원 공동 주관으로 경기도 서른한 개 지역의 술 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자리였다.
축제 현장이 바로 집 앞이어서 가볍게 찾아가면서 술을 매개로 한 축제라서 안전 문제가 조금 염려됐다. 하지만 온천공원 북측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이런 기우는 싹 사라졌다.
이천문화원에서는 입장객의 신분증 확인 후 성인에게만 주류 구매와 시음이 가능한 노랑 팔찌를 제공해 미성년자의 주류 시음과 구매를 방지했다. 성인인증 시음용 컵도 준비해 누구나 축제에 입장할 수는 있어도 아무나 술을 마실 순 없도록 철저히 단속했다. 운영본부도 크게 마련해 응급의료진과 안전관리 요원도 여러 명 상주시켰다.
알코올이 들어있어 마시면 취하는 음료인 술은 신화 속에 나올 정도로 역사가 오래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건국 신화가 담긴 〈고삼국사기(古三國史記)〉에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술을 이용해 유화를 유혹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고, 그리스신화에도 제우스의 아들 디오니소스가 동굴에 쌓아두었던 포도에서 포도주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러한 술을 주제로 한 독특한 축제여서 그런지 온천공원은 가족 혹은 친구나 연인 단위로 행사장을 찾은 남녀노소로 아침 일찍부터 붐볐다. 초록 가득하던 온천공원은 화기애애한 관람객들로 꽃이 활짝 핀 봄날 같았다.
행사장은 특색에 따라 총 다섯 개의 존으로 구성됐고, 주를 이룬 술은 우리나라 전통주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막걸리였다.
양조장이나 가양주 장인의 발효 방법에 그 맛이 천차만별인 막걸리는 서른한 개 지역문화원 부스에 따라 신맛, 단맛, 떫은맛 등 다채로운 맛과 향을 뽐내며 관람객을 맞았다.
맥주 회사 동료 여럿이 팀을 꾸려 견학 겸 시음을 나온 일행 중 한 명은 “동네에서 이렇게 다양한 지역 술을 만나고 깊은 맛과 향을 내는 술도 알게 돼 주류업계 종사자로서 반갑다.”라며 행사 취지에 크게 공감했다.
개인적으로는 무거운 송명섭 막걸리나 신맛 강한 금정산성 막걸리를 좋아해서인지 양주문화원 부스에서 오래 머물렀다. 김양주 장인의 가양주는 한 모금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바로 고이게 하는 맛으로 막걸리 애호가의 입맛을 금세 사로잡았다. 쌀과 누룩, 그리고 물. 세 가지 재료의 배합만으로 다양한 맛과 향을 내는 막걸리에 감탄하며 지갑도 꽤 열었다.
알코올 함량 53%인 증류주는 부드러운 목 넘김 다음에 속을 훈훈하게 덥혀주었다. 추운 겨울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나 기름진 음식의 반주로 곁들이기에 좋아 애주가인 지인에게 선물하려고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천에서 생산하는 막걸리와 맥주, 와인, 그리고 관련 제품들도 모처럼 한자리에서 만나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천의 특산물인 게걸무 음식들도 특유의 식감으로 관람객들에게 금강산도 식후경의 맛을 선사했다. 홀짝홀짝 여러 잔의 시음으로 살며시 오른 취기는 동두천문화원의 맑고 시원한 연꽃차로 삭혔고, 주도 체험, 예쁜 술잔 만들기, 그리고 해당 지역의 시니어들과 함께한 문화 활동을 선보인 ’13개 마을의 유쾌한 노년 이야기 존에서의 다채로운 전시와 체험으로 인기가 많았다.
온천공원 주 통행로를 가리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가장자리에 배열한 아담한 행사 부스는 축제의 백미였다. 같은 디자인으로 앙증맞게 내건 지역문화원 간판과 시음 및 전시 판매용 작은 테이블도 관람객의 동선을 막지 않았다. 옛날 잔칫집 마당이 꼭 이런 모습이었다. 마당 한 가운데에 손님을 주인공으로 모시고 잔칫집 주방과 주인장은 외곽에 자리했다.무대 행사 음향도 어깨춤이 날 정도로만 흥을 돋워 주말 오전 늦잠을 즐기는 인근 지역 주민들의 미간을 좁히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관람객들은 오히려 오전 열한 시부터 오후 네 시까지 딱 다섯 시간만 이어진 축제를 아쉬워했다. 더러는 벌써 내년을 기약했다. 그래도 지역의 멋과 맛이 담겨 묵직해진 노란 장바구니에 만족하며 집으로 향했다.
지역문화를 주도(主導)하는 이천문화원의 새롭고 이색적인 ’주도(酒道)‘축제에 기분 좋게 취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