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문화살롱,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를 마감하며 - 산타페(류봉열)
2025.11.18.-19. 군산으로 시간여행을 다녀와서
도종환 시인은 노래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 시에서 한시 사이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세 시에서 다섯 시 시에서(일부)
지난 3년이란 세월을 이천문화원이 진행하는 담론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인생의 한 시기를 마무리하고, 다음 인생 2기를 준비하거나 2기에 접어들면서 활동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50대 중반부터 60대 중반까지 은퇴자나 은퇴 예정자가 모였다.

물론 담론의 주제는 해마다 달리했다. 담론은 과정으로 끝나는 언어의 유희가 아니라 실천이 담보되는 현장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각자의 차이에 따라 갈등과 긴장도 일어났고, 감동과 공감의 선한 영향력도 공유했다.
신중년(?)은 누구이며, 그들이 직면한 현실을 이야기하다.
지역에서 신중년이란 이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역할을 담론형으로 진행했다. 신중년이란 개념이 무엇인지부터 설왕설래했다. 제3세대, 빨간 스웨터, 실버 세대, 시니어, 어르신, 노년, 노인, 선배 시민 등 다양한 명사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의미도 차이가 있다는 점도 이해했다.
또한 우리 세대가 직면한 문제인 질병, 고독, 죽음, 이별, 애도, 자녀 관계, 경제적 자립, 혼밥, 혼술 등등의 당면한 문제를 주제로 삼아 토론의 장에 올렸다. 선정된 주제는 당연한 듯 간주했다. 하지만 이제 제2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참가자들과 죽음, 이별, 애도라는 불편하면서도 회피하고 싶은 주제를 토론의 장에 올리는 문제는 참가자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삶을 온전히 살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거부하거나 외면하는 일은 올바른 시니어로서의 행동이나 답은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 인정하게 됐다. 지금은 죽음이란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해도 모두 무릎을 맞대고 진지하게 담론을 진행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강화도에서 함께 관람한 ‘헤밍웨이 집으로 가는 길’이란 영화도 큰 역할을 했다. 치매에 걸린 남편이 아내가 좋아하는 헤밍웨이 작가의 흔적을 찾아 위험한 운전을 하다가 결국은 중도에서 자유의지로 함께 삶을 마감하는 영화로, 노부부의 천진난만하고 불안하게 펼쳐지는 여정과 끝이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슬펐다. 그날 저녁에 모여 앉아 서로 영화 감상평을 나누며 가슴 벅찬 경험을 한 이후로 어떠한 주제를 선정해도 기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하게 수용하고, 진행할 수 있었다.
스마트 기기 사용, 느려도 좋아 이젠 어디서든 자신 있게 할 수 있어.
누구나 손에 쥐고 있는 스마트폰 사용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문제의식 역시 필요했다. 토론하다 보니 우리 자신부터 기기 사용에 대한 무지가 드러났다. 기본적인 사용법조차 일부는 외면하고 있었다. 그래서 직접 스스로 학습하고 실습한 후 우리와 같은 스마트 기기의 약자인 시니어를 대상으로 사용 빈도가 높고 필요한 고속버스, 시외버스 교통편을 스마트폰으로 예약하는 강좌를 열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키오스크(kiosk, 명사 공공장소에 설치된 무인 정보 단말기. 주로 정부 기관이나 은행, 백화점, 전시장 등에 설치되어 있으며 대체로 터치스크린 방식을 사용한다.)의 사용에 관한 담론도 이어졌다.
관공서를 들리거나 심지어 식당이나 카페에서조차 일대일 대면 방식이 아니라 키오스크란 기기를 사용해 주문하고 결제하는 일이 일상화됐다. 시니어라고 사용을 못 할 기기는 아니다. 다만 절차가 복잡하고, 글씨가 작다 보니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 조금 느릴 뿐이다. 우리들의 행동이나 판단이 세상이 돌아가는 속도만큼 같거나, 빠를 이유는 없다. 물리적, 신체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인지된 사실이라 나는 느리다는 행동이 부끄럽지도 미안하지도 않다.

가장 복잡하다는 유명한 패스트푸드점이나 카페에 가서 키오스크 기기를 사용해 봤다. 손님이 몰리는 시간대에는 피했다. 절차가 복잡하고 글씨는 작다 보니 처음에는 주문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뒤에 젊은이가 기다릴 때는 마음이 불안하고 조바심도 났다. 하지만 차분하게 천천히 하나씩 골라, 터치하고, 장바구니에 담은 다음, 카드 결제까지 누르기를 반복하니 이제는 키오스크로 주문받는 어떤 장소에서 들어가더라도 두려움 없이 주문하는 등 당당해졌다.
이천문화중산층으로의 삶, 우리 삶의 기준이 되다.
지난 2023년 이천문화원은 창립 60주년을 맞이하여 이천문화시민으로서 지속가능한 문화도시를 만들기 위하여 실천 기준 7가지가 담긴 <이천의 문화중산층>으로의 삶을 제안했다.
중산층이라는 정의나 기준이 문화 선진국이라는 국가와 우리나라와는 다르다는 사실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다행히 이천문화원이 앞장서서 그들보다 뒤지지 않는 문화 중산층 기준을 만들고 선포했는데, 다만 실천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그래서 올해는 7가지 실천 기준을 담론 주제로 삼고, 이를 이행하는 해로 정했다.
문화중산층 실천 과제를 하나하나 실천해 보니 우리의 삶이.
공연이나 전시를 보기 위해 검색창을 열고 나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찾았다. 누구는 부산에서 열린 <힐마 아프 클린트>의 전시회를, 누구는 부여의 박물관을, 누구는 소속된 단체의 여행 계획을 더 세밀하고 수립했다. 다음 모임에서 결과를 차례차례 발표했다. 스마트 기기 사용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나지만, 나를 위한 여가 시간을 스스로 정하고, 계획을 세워 다녀온 경험을 나누면서 뿌듯함과 함께 여행이나 놀이 문화도 이제는 달라졌음을 스스로 느끼기도 했다.

화장실 청소에 진심인 <퍼펙트 데이즈>란 영화를 보고 갑자기 화장실을 청소하고 싶어졌다. 때마침 설봉문화제가 설봉공원 도자미술관 앞 광장에서 2일간 열렸다. 가장 민원이 많이 발생한다던 화장실을 청소하기 위해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물론, 화장실은 미술관 측에서 담당한다고 했지만, 이틀간 봉사활동을 하면서 광장 바닥에 작은 종이조각 하나 보이지 않도록 수시로 돌아다니며 청소했다.

사회적 이슈를 발굴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나눴다. 1998년 이천문화원이 최초로 주관했던 <제1회 이천국제조각심포지엄>이 지난해까지 열린 뒤, 올해부터 조각작품 재배치 사업으로 휴면기에 접어들었다. 다만 그 결정을 주관했던 기관이나 단체, 시민들에게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은 점을 이슈로 삼아 다양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담론형 모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를 군산에서 마감하며
이천문화살롱에 참여자 대부분은 도종환 시인의 시처럼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서 삶과 시간의 선상을 오늘도 지나고 있을 터이다. 그래서 올해 모임명을 그리 정했다. 군산으로의 연수는 그 마무리를 위하여 준비했다. 방문 장소를 선정하는 일과 관계자를 섭외하는 일은 서로 분담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군산이란 도시로의 연수는 어쩌면 시니어에게 지나온 삶을 반추하고, 남은 생을 찬란한 노을과 황혼을 바라보며 긍정적이고 기쁘게 환대할 수 있는 연수지로 적합했다.

첫날 군산집에서 점심을 먹은 후 말랭이 마을로 올라갔다. 평일이라 찾는 사람은 드물었다. 우리가 첫 번째로 방문한 장소는 주민의 삶과 기록을 전시하는 <이야기 마당>이란 공간이다. 때마침 군산 출신 도예가인 김혁수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오브제 형식으로 작품의 양식과 크기가 다양했다. 우리가 늘 보아왔던 매병이나 주병, 생활도자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공간은 <봄날의 산책>이라는 책방이다. 주로 시집을 기반으로 군산 출신 작가들의 작품집이 눈에 띈다. 작고 협소한 공간이지만 시 등 문학을 매개로 지역의 어르신은 물론, 주민과 소통하는 노력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각자 시집을 한 권씩 손에 들었다.

과거 양조장 공간도 방문했다. 동네 어르신들이 싱싱한 물오징어를 다듬고 계셨다. 파전에 넣기 위해서다. 파전 하나를 주문하면 군산 막걸리는 덤이다. 대여섯 분이 각자 맡은 일을 미루지 않고 척척해 내시는 모습이 정말 어르신답다.
수시로 진행된 토론에서 우리의 삶을 정리해 보니
양조장 공간에서 ‘은퇴하고 담론 모임에 참여하면서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일이 무엇인가요’라고 질문을 던졌다. 한 사람은 그동안 사물이나 대상을 바라볼 때 멋지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전체를 조망하는 일을 중요시했지만, 지금은 일상적이며 사소하고 소소하지만, 그 속에서 소중하고 즐거운 가치를 찾아내는 일이 중요해졌다고 했고, 삶이란 긴 여행을 하다 보니 무엇보다도 건강이 최고라는 말에 많은 이가 공감했다. 특히 타인의 시선이나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제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의견은 모두의 박수를 받았다.

차를 마시려고 <소현고택 카페>를 방문했다. 일본 고택을 이용한 카페로 한쪽에서는 젊은이들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음료를 주문하고 다시 둘러앉아 올해 읽은 책 중 인상이 강하게 남은 책과 내용을 서로 이야기했다. 누군가는 그림 감상에 도움이 되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었다고 했고, 또한 다른 이는 조력사를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시어머니 이야기를 다룬 <고요한 결심>이란 책에서 한국 사람과 프랑스 사람들의 죽음을 대하는 문화차이를 담담히 이야기했다.

둘째 날도 토론은 이어졌다.
군산에서 활동하는 활동가 세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역의 한 사람으로서 나 자신을 알고, 남을 탓하지 않으며, 스스로 성장하려고 노력하면서 긍정적 마인드로 타인과 연대하는 방안에 우리는 동의했다. 또한 과거의 시간으로 축적된 전통을 오늘 군산 지역만의 정통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는 주장은 참신했다. 특히 지역에서 나의 쓰임을 위해 자기 객관화는 필수라며, 나만의 전공, 특기, 경험, 장점이라는 견고한 울타리를 고집하지 말고, 유연하게 내려놓아야 비로소 지역에서 느슨한 연대가 시작되고, 지역과의 관계에서 살아있는 숨을 불어 넣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시니어인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세상은 비록 느려도 평범하면서도 유연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드는 거야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그래도 우리는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되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비록 물리적인 행동과 사고의 판단이 다소 느리더라도 좋다. 다만 소소한 일에도 박수치고, 크게 기뻐했으면. 사소하고 소외된 대상도 환대하는 눈으로 바라봤으면. 하루하루 문화중산층으로 행동하고 사유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말했다.
“사실 이 세상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수많은 시시하고 평범한 사람들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이고, 또 이 정도로 지탱되고 있는지도 모른다”라고. 맞는 말이다. 나는 주창한다. 시니어는 특정한 몇 곳에서 그들만의 울타리 속에서 그들만의 이야기를 나누는 일에 반대한다. 오랫동안 자랑스럽고 견고하게 쌓아왔던 특기, 경험, 지혜 등이 다른 한편으로는 타인을 강제하는 아집이나 장벽일 수도 있으니, 이젠 허물어도 좋다고.
이천문화살롱,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를 마감하며 - 산타페(류봉열)
2025.11.18.-19. 군산으로 시간여행을 다녀와서
도종환 시인은 노래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 시에서 한시 사이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세 시에서 다섯 시 시에서(일부)
지난 3년이란 세월을 이천문화원이 진행하는 담론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인생의 한 시기를 마무리하고, 다음 인생 2기를 준비하거나 2기에 접어들면서 활동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50대 중반부터 60대 중반까지 은퇴자나 은퇴 예정자가 모였다.
물론 담론의 주제는 해마다 달리했다. 담론은 과정으로 끝나는 언어의 유희가 아니라 실천이 담보되는 현장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각자의 차이에 따라 갈등과 긴장도 일어났고, 감동과 공감의 선한 영향력도 공유했다.
신중년(?)은 누구이며, 그들이 직면한 현실을 이야기하다.
지역에서 신중년이란 이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역할을 담론형으로 진행했다. 신중년이란 개념이 무엇인지부터 설왕설래했다. 제3세대, 빨간 스웨터, 실버 세대, 시니어, 어르신, 노년, 노인, 선배 시민 등 다양한 명사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의미도 차이가 있다는 점도 이해했다.
또한 우리 세대가 직면한 문제인 질병, 고독, 죽음, 이별, 애도, 자녀 관계, 경제적 자립, 혼밥, 혼술 등등의 당면한 문제를 주제로 삼아 토론의 장에 올렸다. 선정된 주제는 당연한 듯 간주했다. 하지만 이제 제2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참가자들과 죽음, 이별, 애도라는 불편하면서도 회피하고 싶은 주제를 토론의 장에 올리는 문제는 참가자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삶을 온전히 살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거부하거나 외면하는 일은 올바른 시니어로서의 행동이나 답은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 인정하게 됐다. 지금은 죽음이란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해도 모두 무릎을 맞대고 진지하게 담론을 진행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강화도에서 함께 관람한 ‘헤밍웨이 집으로 가는 길’이란 영화도 큰 역할을 했다. 치매에 걸린 남편이 아내가 좋아하는 헤밍웨이 작가의 흔적을 찾아 위험한 운전을 하다가 결국은 중도에서 자유의지로 함께 삶을 마감하는 영화로, 노부부의 천진난만하고 불안하게 펼쳐지는 여정과 끝이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슬펐다. 그날 저녁에 모여 앉아 서로 영화 감상평을 나누며 가슴 벅찬 경험을 한 이후로 어떠한 주제를 선정해도 기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하게 수용하고, 진행할 수 있었다.
스마트 기기 사용, 느려도 좋아 이젠 어디서든 자신 있게 할 수 있어.
누구나 손에 쥐고 있는 스마트폰 사용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문제의식 역시 필요했다. 토론하다 보니 우리 자신부터 기기 사용에 대한 무지가 드러났다. 기본적인 사용법조차 일부는 외면하고 있었다. 그래서 직접 스스로 학습하고 실습한 후 우리와 같은 스마트 기기의 약자인 시니어를 대상으로 사용 빈도가 높고 필요한 고속버스, 시외버스 교통편을 스마트폰으로 예약하는 강좌를 열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키오스크(kiosk, 명사 공공장소에 설치된 무인 정보 단말기. 주로 정부 기관이나 은행, 백화점, 전시장 등에 설치되어 있으며 대체로 터치스크린 방식을 사용한다.)의 사용에 관한 담론도 이어졌다.
관공서를 들리거나 심지어 식당이나 카페에서조차 일대일 대면 방식이 아니라 키오스크란 기기를 사용해 주문하고 결제하는 일이 일상화됐다. 시니어라고 사용을 못 할 기기는 아니다. 다만 절차가 복잡하고, 글씨가 작다 보니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 조금 느릴 뿐이다. 우리들의 행동이나 판단이 세상이 돌아가는 속도만큼 같거나, 빠를 이유는 없다. 물리적, 신체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인지된 사실이라 나는 느리다는 행동이 부끄럽지도 미안하지도 않다.
가장 복잡하다는 유명한 패스트푸드점이나 카페에 가서 키오스크 기기를 사용해 봤다. 손님이 몰리는 시간대에는 피했다. 절차가 복잡하고 글씨는 작다 보니 처음에는 주문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뒤에 젊은이가 기다릴 때는 마음이 불안하고 조바심도 났다. 하지만 차분하게 천천히 하나씩 골라, 터치하고, 장바구니에 담은 다음, 카드 결제까지 누르기를 반복하니 이제는 키오스크로 주문받는 어떤 장소에서 들어가더라도 두려움 없이 주문하는 등 당당해졌다.
이천문화중산층으로의 삶, 우리 삶의 기준이 되다.
지난 2023년 이천문화원은 창립 60주년을 맞이하여 이천문화시민으로서 지속가능한 문화도시를 만들기 위하여 실천 기준 7가지가 담긴 <이천의 문화중산층>으로의 삶을 제안했다.
중산층이라는 정의나 기준이 문화 선진국이라는 국가와 우리나라와는 다르다는 사실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다행히 이천문화원이 앞장서서 그들보다 뒤지지 않는 문화 중산층 기준을 만들고 선포했는데, 다만 실천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그래서 올해는 7가지 실천 기준을 담론 주제로 삼고, 이를 이행하는 해로 정했다.
문화중산층 실천 과제를 하나하나 실천해 보니 우리의 삶이.
공연이나 전시를 보기 위해 검색창을 열고 나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찾았다. 누구는 부산에서 열린 <힐마 아프 클린트>의 전시회를, 누구는 부여의 박물관을, 누구는 소속된 단체의 여행 계획을 더 세밀하고 수립했다. 다음 모임에서 결과를 차례차례 발표했다. 스마트 기기 사용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나지만, 나를 위한 여가 시간을 스스로 정하고, 계획을 세워 다녀온 경험을 나누면서 뿌듯함과 함께 여행이나 놀이 문화도 이제는 달라졌음을 스스로 느끼기도 했다.
화장실 청소에 진심인 <퍼펙트 데이즈>란 영화를 보고 갑자기 화장실을 청소하고 싶어졌다. 때마침 설봉문화제가 설봉공원 도자미술관 앞 광장에서 2일간 열렸다. 가장 민원이 많이 발생한다던 화장실을 청소하기 위해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물론, 화장실은 미술관 측에서 담당한다고 했지만, 이틀간 봉사활동을 하면서 광장 바닥에 작은 종이조각 하나 보이지 않도록 수시로 돌아다니며 청소했다.
사회적 이슈를 발굴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나눴다. 1998년 이천문화원이 최초로 주관했던 <제1회 이천국제조각심포지엄>이 지난해까지 열린 뒤, 올해부터 조각작품 재배치 사업으로 휴면기에 접어들었다. 다만 그 결정을 주관했던 기관이나 단체, 시민들에게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은 점을 이슈로 삼아 다양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담론형 모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를 군산에서 마감하며
이천문화살롱에 참여자 대부분은 도종환 시인의 시처럼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서 삶과 시간의 선상을 오늘도 지나고 있을 터이다. 그래서 올해 모임명을 그리 정했다. 군산으로의 연수는 그 마무리를 위하여 준비했다. 방문 장소를 선정하는 일과 관계자를 섭외하는 일은 서로 분담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군산이란 도시로의 연수는 어쩌면 시니어에게 지나온 삶을 반추하고, 남은 생을 찬란한 노을과 황혼을 바라보며 긍정적이고 기쁘게 환대할 수 있는 연수지로 적합했다.
첫날 군산집에서 점심을 먹은 후 말랭이 마을로 올라갔다. 평일이라 찾는 사람은 드물었다. 우리가 첫 번째로 방문한 장소는 주민의 삶과 기록을 전시하는 <이야기 마당>이란 공간이다. 때마침 군산 출신 도예가인 김혁수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오브제 형식으로 작품의 양식과 크기가 다양했다. 우리가 늘 보아왔던 매병이나 주병, 생활도자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공간은 <봄날의 산책>이라는 책방이다. 주로 시집을 기반으로 군산 출신 작가들의 작품집이 눈에 띈다. 작고 협소한 공간이지만 시 등 문학을 매개로 지역의 어르신은 물론, 주민과 소통하는 노력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각자 시집을 한 권씩 손에 들었다.
과거 양조장 공간도 방문했다. 동네 어르신들이 싱싱한 물오징어를 다듬고 계셨다. 파전에 넣기 위해서다. 파전 하나를 주문하면 군산 막걸리는 덤이다. 대여섯 분이 각자 맡은 일을 미루지 않고 척척해 내시는 모습이 정말 어르신답다.
수시로 진행된 토론에서 우리의 삶을 정리해 보니
양조장 공간에서 ‘은퇴하고 담론 모임에 참여하면서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일이 무엇인가요’라고 질문을 던졌다. 한 사람은 그동안 사물이나 대상을 바라볼 때 멋지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전체를 조망하는 일을 중요시했지만, 지금은 일상적이며 사소하고 소소하지만, 그 속에서 소중하고 즐거운 가치를 찾아내는 일이 중요해졌다고 했고, 삶이란 긴 여행을 하다 보니 무엇보다도 건강이 최고라는 말에 많은 이가 공감했다. 특히 타인의 시선이나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제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의견은 모두의 박수를 받았다.
차를 마시려고 <소현고택 카페>를 방문했다. 일본 고택을 이용한 카페로 한쪽에서는 젊은이들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음료를 주문하고 다시 둘러앉아 올해 읽은 책 중 인상이 강하게 남은 책과 내용을 서로 이야기했다. 누군가는 그림 감상에 도움이 되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었다고 했고, 또한 다른 이는 조력사를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시어머니 이야기를 다룬 <고요한 결심>이란 책에서 한국 사람과 프랑스 사람들의 죽음을 대하는 문화차이를 담담히 이야기했다.
둘째 날도 토론은 이어졌다.
군산에서 활동하는 활동가 세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역의 한 사람으로서 나 자신을 알고, 남을 탓하지 않으며, 스스로 성장하려고 노력하면서 긍정적 마인드로 타인과 연대하는 방안에 우리는 동의했다. 또한 과거의 시간으로 축적된 전통을 오늘 군산 지역만의 정통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는 주장은 참신했다. 특히 지역에서 나의 쓰임을 위해 자기 객관화는 필수라며, 나만의 전공, 특기, 경험, 장점이라는 견고한 울타리를 고집하지 말고, 유연하게 내려놓아야 비로소 지역에서 느슨한 연대가 시작되고, 지역과의 관계에서 살아있는 숨을 불어 넣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시니어인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세상은 비록 느려도 평범하면서도 유연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드는 거야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그래도 우리는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되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비록 물리적인 행동과 사고의 판단이 다소 느리더라도 좋다. 다만 소소한 일에도 박수치고, 크게 기뻐했으면. 사소하고 소외된 대상도 환대하는 눈으로 바라봤으면. 하루하루 문화중산층으로 행동하고 사유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말했다.
“사실 이 세상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수많은 시시하고 평범한 사람들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이고, 또 이 정도로 지탱되고 있는지도 모른다”라고. 맞는 말이다. 나는 주창한다. 시니어는 특정한 몇 곳에서 그들만의 울타리 속에서 그들만의 이야기를 나누는 일에 반대한다. 오랫동안 자랑스럽고 견고하게 쌓아왔던 특기, 경험, 지혜 등이 다른 한편으로는 타인을 강제하는 아집이나 장벽일 수도 있으니, 이젠 허물어도 좋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