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매무새꾼의 花樣年華(화양연화)
옷매무새꾼 조 효 식
‘화양연화’ -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이란 뜻이란다.
문화원 시니어모델 수업 중 ‘화양연화’의 뜻을 처음 알게 되었다. 뜻을 이해하는 순간 그 옛날 남편과 얼싸안고 눈물 흘리면서 좋아하던 순간들이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 그때가 나는 가장 좋았었지...” 하면서.

연애하던 시절 남편은 공무원 시험에서 2번 낙방했다. 그러면서 결혼도 했고 첫딸도 낳았다. 첫 딸을 낳고 2주쯤 되는 날, 남편은 또 시험을 보러 간다고 했다. 그 전년도공무원 시험과정에 부정이 개입되어 합격과 불합격이 엇갈리는 소동이 있었고 남편은 나이 제한으로 그해가 마지막 시험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합격이 절실했다.
시험 보러 가는 날 “설마 이번에도 또 떨어질까?”, “떨어지고 붙는 건 하늘의 뜻이겠지” 하는 마음으로 새벽에 일어나 미역국을 끓였다. 그 중요한 시험 날 미역국이라니... 남편은 미역국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미역국 한 그릇을 맛있게 먹고 수원 가는 첫 버스를 타고 시험을 보러 갔다. 물론 시부모님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무덤으로 가셨다. 다행히 남편은 합격했고 남편의 월급봉투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세 자녀를 키워낸 일곱 식구의 소중한 생명줄이 되었다. 박봉으로 알뜰히 살아온 생활습관 덕분에 지금도 적은 연금이지만 넉넉하게 살고 있다. 돈이 많아서 넉넉한 것은 아니고 마음이 넉넉했던 것 같다. 세상은 돈이 전부가 아니니까.


막내까지 대학을 보내고 나니 덩그러니 남아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뒤늦게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공부도 해보았지만 하면 할수록 공허해졌다. 마음은 점점 더 채워지기를 원했고 몸은 점점 약해져갔다. 결국 두 번의 큰 수술을 받고나서 건강을 위해 ‘국선도’라는 운동을 시작했다. 올해로 국선도를 시작한지 벌써 31년이 되었고 국선도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지도 12년이 넘었다. 국선도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나의 좌우명을 “學不厭 敎不倦(학불염 교불권)”으로 정하고 늘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배우든 배운 것은 반드시 남에게 나눠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노력하면서 살고 있다.
나는 아직 종교는 없지만 正心(바른 마음)으로 正視(바르게 보고) 正覺(바르게 깨닫고) 뚜벅뚜벅 살아가려고 한다. 인생을 살면서 힘들지 않은 사람 어디 있었겠는가? 누구나 힘든 과정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삶이 고달프고 힘들 때는 易(역)으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易(역)자는 “쉽다. 바꾸다. 새로워지다” 는 뜻을 가지고 있다.
周易(주역)을 공부하면서 그 옛날 미역국을 끓였을 때가 다시 떠올랐다. 남편의 시험 합격이 정말 간절했지만, 오히려 다 내려놓고 시험에서 떨어져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미역국을 끓였더니 오히려 좋은 결과가 있었다. 나도 한때는 의미 없는 단어에 얽매였던 일들이 非一非再(비일비재)했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일이 잘 안 풀리고 답답할 때는 바꿔서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인생에 정답은 없으니까.

나는 화장도 하지 않으면서 이 정도면 조금 예쁘다고 자부하면서 자신만만하게 살았었다. 하지만 나이 70살이 넘으면서 얼굴에 주름이 늘어나서 거울보기도 싫어졌다. 몸의 젊음은 운동으로 그런대로 지켜왔지만 얼굴의 젊음을 지키지 못하고 살았던 지난날이 후회되었고 여성의 아름다움이 그리워졌다. 나도 여자인데 좋은 옷 입고 아름답게 화장도 하고 싶었지만 안 해보던 짓을 하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는 동안 주름살은 더 늘어났고 ‘이젠 정말 늙어서 어쩔 수 없구나.’ 하며 포기했었다. 그 무렵 코로나로 집안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마스크를 써야만 하는 상황이 되자 주름살을 가릴 수 있어서 오히려 좋기도 했다.
그러던 중 문화원에서 시니어모델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모델? 내가 모델을 할 수 있을까? 설렘과 기대보다 걱정이 더 많았지만 용기를 내어 신청했다. 이번 기회에 지금까지의 나를 확 바꾸고 싶었다. 마스크를 쓰고 시작한 시니어 모델 수업은 정부방침에 따라 중단하기를 반복하면서 간신히 20강을 마칠 수 있었다. 지금은 3년째 나의 아름다움과 멋스러움을 찾아가고 있지만 마음처럼 쉽지는 않았다. 다행히 워킹수업은 국선도수련 덕분에 체력적으로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포즈를 취하고 멋을 부리는 과정은 지금도 어색하고 쑥스러워서 잘 안 된다. 화장도 너무 오랫동안 안 하고 꾸미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어색하다. 감사하게도 공연이 있을 때 마다 전현나 선생님이 색조화장을 해주신다. 주름진 얼굴에 곱게 화장을 해주시는 선생님은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정성스럽게 눈썹까지 붙여주면서 내 얼굴을 더 예쁘게 바꿔주신다. 선생님께 늘 부끄럽고 미안하고 감사했는데 지면을 통해서 감사드린다.
얼굴에 잡힌 주름살은 내 인생의 계급장으로 생각하면서 더 이상 미련두지 않고 살고 싶은데, 한 번씩 색조 화장을 하고 공연을 끝내고나면 얼굴 성형에 대한 유혹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도 솔직한 여자의 마음이다.


사람들은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얼굴에 주름이 있어도 나는 지금이 가장 좋다. 모델 수업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해보았다. 결혼식 이후 처음으로 색조화장을 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되어보았고. 결혼식 때 입었던 드레스를 50년 만에 다시 입어보기도 했다. 청 자켓에 핫팬츠를 입고 긴 부츠를 신고 젊은이들과 공연을 할 때는 나이를 잊어버리고 정말 행복했고 즐거웠었다. 꿈은 아니겠지?...
시니어 모델 수업을 3년 동안 받으면서 ‘모델 수업은 다양하고 폭넓은 수업’이라는 것을 느꼈다. 모델 수업은 몸이 만들어지고, 마음이 만들어지고, 정신까지 만들어주는 수업인 것 같다. 모델 수업도 10년쯤 해야만 조금 익숙해 질 것 같다. ‘10년 공부’란 말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50년 된 드레스와 옛날 사진을 다시 꺼내보았다. 몇 번이고 버리려고 내놓았던 우리의 생명줄이었던 월급봉투를 꺼내 보면서 또 한 번 꼰대노릇을 해 보았다. “나는 이 봉급을 가지고 일곱 식구 살림을 했단다.” 라고.
앞으로 계속 모델수업을 받으면서 곱게 늙어가는 7년 후의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행복한 미소를 짓게 된다. “내 인생의 화양연화는 ‘옷매무새꾼’에서였다.” 라고.
옷매무새꾼의 花樣年華(화양연화)
옷매무새꾼 조 효 식
‘화양연화’ -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이란 뜻이란다.
문화원 시니어모델 수업 중 ‘화양연화’의 뜻을 처음 알게 되었다. 뜻을 이해하는 순간 그 옛날 남편과 얼싸안고 눈물 흘리면서 좋아하던 순간들이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 그때가 나는 가장 좋았었지...” 하면서.
연애하던 시절 남편은 공무원 시험에서 2번 낙방했다. 그러면서 결혼도 했고 첫딸도 낳았다. 첫 딸을 낳고 2주쯤 되는 날, 남편은 또 시험을 보러 간다고 했다. 그 전년도공무원 시험과정에 부정이 개입되어 합격과 불합격이 엇갈리는 소동이 있었고 남편은 나이 제한으로 그해가 마지막 시험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합격이 절실했다.
시험 보러 가는 날 “설마 이번에도 또 떨어질까?”, “떨어지고 붙는 건 하늘의 뜻이겠지” 하는 마음으로 새벽에 일어나 미역국을 끓였다. 그 중요한 시험 날 미역국이라니... 남편은 미역국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미역국 한 그릇을 맛있게 먹고 수원 가는 첫 버스를 타고 시험을 보러 갔다. 물론 시부모님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무덤으로 가셨다. 다행히 남편은 합격했고 남편의 월급봉투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세 자녀를 키워낸 일곱 식구의 소중한 생명줄이 되었다. 박봉으로 알뜰히 살아온 생활습관 덕분에 지금도 적은 연금이지만 넉넉하게 살고 있다. 돈이 많아서 넉넉한 것은 아니고 마음이 넉넉했던 것 같다. 세상은 돈이 전부가 아니니까.
막내까지 대학을 보내고 나니 덩그러니 남아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뒤늦게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공부도 해보았지만 하면 할수록 공허해졌다. 마음은 점점 더 채워지기를 원했고 몸은 점점 약해져갔다. 결국 두 번의 큰 수술을 받고나서 건강을 위해 ‘국선도’라는 운동을 시작했다. 올해로 국선도를 시작한지 벌써 31년이 되었고 국선도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지도 12년이 넘었다. 국선도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나의 좌우명을 “學不厭 敎不倦(학불염 교불권)”으로 정하고 늘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배우든 배운 것은 반드시 남에게 나눠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노력하면서 살고 있다.
나는 아직 종교는 없지만 正心(바른 마음)으로 正視(바르게 보고) 正覺(바르게 깨닫고) 뚜벅뚜벅 살아가려고 한다. 인생을 살면서 힘들지 않은 사람 어디 있었겠는가? 누구나 힘든 과정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삶이 고달프고 힘들 때는 易(역)으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易(역)자는 “쉽다. 바꾸다. 새로워지다” 는 뜻을 가지고 있다.
周易(주역)을 공부하면서 그 옛날 미역국을 끓였을 때가 다시 떠올랐다. 남편의 시험 합격이 정말 간절했지만, 오히려 다 내려놓고 시험에서 떨어져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미역국을 끓였더니 오히려 좋은 결과가 있었다. 나도 한때는 의미 없는 단어에 얽매였던 일들이 非一非再(비일비재)했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일이 잘 안 풀리고 답답할 때는 바꿔서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인생에 정답은 없으니까.
나는 화장도 하지 않으면서 이 정도면 조금 예쁘다고 자부하면서 자신만만하게 살았었다. 하지만 나이 70살이 넘으면서 얼굴에 주름이 늘어나서 거울보기도 싫어졌다. 몸의 젊음은 운동으로 그런대로 지켜왔지만 얼굴의 젊음을 지키지 못하고 살았던 지난날이 후회되었고 여성의 아름다움이 그리워졌다. 나도 여자인데 좋은 옷 입고 아름답게 화장도 하고 싶었지만 안 해보던 짓을 하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는 동안 주름살은 더 늘어났고 ‘이젠 정말 늙어서 어쩔 수 없구나.’ 하며 포기했었다. 그 무렵 코로나로 집안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마스크를 써야만 하는 상황이 되자 주름살을 가릴 수 있어서 오히려 좋기도 했다.
그러던 중 문화원에서 시니어모델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모델? 내가 모델을 할 수 있을까? 설렘과 기대보다 걱정이 더 많았지만 용기를 내어 신청했다. 이번 기회에 지금까지의 나를 확 바꾸고 싶었다. 마스크를 쓰고 시작한 시니어 모델 수업은 정부방침에 따라 중단하기를 반복하면서 간신히 20강을 마칠 수 있었다. 지금은 3년째 나의 아름다움과 멋스러움을 찾아가고 있지만 마음처럼 쉽지는 않았다. 다행히 워킹수업은 국선도수련 덕분에 체력적으로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포즈를 취하고 멋을 부리는 과정은 지금도 어색하고 쑥스러워서 잘 안 된다. 화장도 너무 오랫동안 안 하고 꾸미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어색하다. 감사하게도 공연이 있을 때 마다 전현나 선생님이 색조화장을 해주신다. 주름진 얼굴에 곱게 화장을 해주시는 선생님은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정성스럽게 눈썹까지 붙여주면서 내 얼굴을 더 예쁘게 바꿔주신다. 선생님께 늘 부끄럽고 미안하고 감사했는데 지면을 통해서 감사드린다.
얼굴에 잡힌 주름살은 내 인생의 계급장으로 생각하면서 더 이상 미련두지 않고 살고 싶은데, 한 번씩 색조 화장을 하고 공연을 끝내고나면 얼굴 성형에 대한 유혹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도 솔직한 여자의 마음이다.
사람들은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얼굴에 주름이 있어도 나는 지금이 가장 좋다. 모델 수업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해보았다. 결혼식 이후 처음으로 색조화장을 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되어보았고. 결혼식 때 입었던 드레스를 50년 만에 다시 입어보기도 했다. 청 자켓에 핫팬츠를 입고 긴 부츠를 신고 젊은이들과 공연을 할 때는 나이를 잊어버리고 정말 행복했고 즐거웠었다. 꿈은 아니겠지?...
시니어 모델 수업을 3년 동안 받으면서 ‘모델 수업은 다양하고 폭넓은 수업’이라는 것을 느꼈다. 모델 수업은 몸이 만들어지고, 마음이 만들어지고, 정신까지 만들어주는 수업인 것 같다. 모델 수업도 10년쯤 해야만 조금 익숙해 질 것 같다. ‘10년 공부’란 말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50년 된 드레스와 옛날 사진을 다시 꺼내보았다. 몇 번이고 버리려고 내놓았던 우리의 생명줄이었던 월급봉투를 꺼내 보면서 또 한 번 꼰대노릇을 해 보았다. “나는 이 봉급을 가지고 일곱 식구 살림을 했단다.” 라고.
앞으로 계속 모델수업을 받으면서 곱게 늙어가는 7년 후의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행복한 미소를 짓게 된다. “내 인생의 화양연화는 ‘옷매무새꾼’에서였다.” 라고.